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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앤 실사판 리뷰 – 시대를 앞선 소녀, 세상을 바꾸다

by zeusmoney1 2025. 4. 17.

 

 

빨간 머리 앤 실사판 리뷰 – 시대를 앞선 소녀, 세상을 바꾸다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 “초록 지붕 집의 앤”을 읽으며 꿈을 키웠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성인이 되어 다시 마주했을 때, 전혀 다른 깊이로 다가오는 작품이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Anne with an E (빨간 머리 앤)”은 바로 그런 드라마다.

 

초록 지붕 집, 빨간 머리, 주근깨, 그리고 넘치는 상상력. 원작 ‘빨간 머리 앤’은 순수하고 따뜻한 아동문학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실사 시리즈는 그 동화적인 분위기에 현대적인 감각을 얹어, 보다 현실적이고 섬세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다시 풀어낸다.

단순히 고아 소녀가 가족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소외와 차별, 성장과 연대, 여성성과 존재의 가치까지 진지하게 다룬다.

 

앤 셜리는 고아다. 그것도 세상의 시선에서 한없이 작고 약한 존재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강하고, 누구보다 단단한 자존감을 품고 있다. 말이 많고, 상상력이 넘치고, 감정 표현이 솔직한 아이. 이 시대에서는 사랑스러울 수 있는 성격이지만, 19세기 말 캐나다에서는 사회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특성이기도 했다.

 

앤은 우연히 초록 지붕 집에 오게 되고, 마릴라와 매슈 커스버트 남매와 함께 살아가게 된다.

그녀의 존재는 조용한 시골 마을에 잔잔하지만 강한 물결을 일으킨다. 특히 학교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앤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해나간다.

 

시청자 입장에서 흥미로운 점은 이 드라마가 단순한 성장담이 아닌,

‘성장’이라는 말조차 너무 단순하게 들릴 만큼 복잡한 내면의 여정을 담았다는 것이다.

앤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고, 여성으로서, 고아로서, 가난한 사람으로서 수많은 벽에 부딪힌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그녀는 항상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해석하고, 상상하고, 바꿔 나간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우고, 사랑을 주는 법도 배우며, 진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겪는다.

이러한 흐름은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맞닥뜨리는 질문들과도 절묘하게 맞닿아 있다.

고전이 아닌, 생생한 인간들

 

앤 셜리’는 이 드라마의 심장이다. 머리는 붉고, 말은 많고, 감정은 솔직하다.

기존의 고전 문학 속 '깜찍한 공주'가 아닌, 시대를 거스르는 작은 혁명가에 가깝다.

앤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하고, 싸우고, 변화한다. 그녀를 단순히 '기발한 아이'라고만 보면, 이 드라마의 반 이상을 놓치는 셈이다.

마릴라 커스버트’는 앤과 대조적인 인물이다. 이성적이고, 규칙을 중시하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깊은 애정과 책임감이 숨어 있다. 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그녀의 변화는, 시대적 편견이 부드럽게 허물어지는 모습을 상징한다.

 

매슈 커스버트’는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노인이다. 말은 거의 없지만, 누구보다 따뜻하게 앤을 감싸준다.

세상과의 벽을 스스로 만든 사람 같지만, 앤을 통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연다.

 

앤의 친구 ‘다이애나’, 그리고 학교에서 마주치는 인물들—특히 ‘길버트 블라이스’와의 관계도 이야기의 큰 축이다.

이들은 단순한 주변 인물이 아니라, 앤이라는 인물을 더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거울 같은 존재들이다.

앤이라는 세계관

‘Anne with an E’는 단순히 원작 소설의 영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앤의 시선을 통해 19세기 말이라는 시대의 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원작에 없던 ‘페미니즘’, ‘인종차별’, ‘퀴어 정체성’, ‘계급 문제’ 등을 담담하게 건드리면서도, 지나치게 교조적이지 않다.

 

앤은 그저 말 많고 엉뚱한 소녀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상상력이든, 언어든, 단지 연민이든 간에, 앤은 행동한다. 그리고 그 행동이 작은 마을의 공기를 바꾸고, 사람들의 시선을 바꾼다.

 

이 드라마는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넘어, 자기 확신과 연대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특히 여자아이로서 세상과 부딪히는 앤의 시선은, 지금의 우리가 겪는 사회 문제들과도 깊게 맞닿아 있다.

나는 어떤 앤이었을까?

이 드라마를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나는 어릴 때 어떤 아이였을까? 나는 나다움을 얼마나 잘 지키고 살고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앤처럼 불편한 질문을 할 용기를 지금도 갖고 있는가?

 

앤은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하나의 렌즈다. 그 렌즈를 통해 우리는 사회가 틀에 끼워 넣으려 했던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문득 깨닫게 된다. 나도, 당신도, 한때는 앤이었다는 것을.

총평

“Anne with an E”는 고전의 향수를 그대로 살리면서도, 지금의 시대가 마주한 고민들을 담아낸 드문 드라마다.

눈에 띄는 사건 없이도 긴장감과 몰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서사보다 사람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또한 회차가 갈수록 깊어지는 감정선과 관계성은 이 작품을 단순한 청춘 성장극 이상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원작 팬이든 아니든, ‘앤’이라는 인물 앞에서는 결국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 드라마가 가진 진짜 힘이다.

개인적인 감상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그저 감성적인 힐링 드라마쯤으로 생각하고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작품은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호했고, 따뜻했지만 날카로웠다.

어쩌면 이 드라마는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조용히 되돌려주는 작품인지도 모른다.

 

앤처럼 나도 상상력이 많았던 아이였다. 하지만 자라면서 점점 “어른스러움”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야 했고, 질문 대신 침묵을 선택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앤은 그런 내 과거를 천천히 어루만져주었다.

 

이 드라마는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보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는다.

마치, 초록 지붕 집 어딘가에 정말 그런 소녀가 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처럼.